꼬꼬무 2 버마 아웅산 테러 사건 전두환 암살 폭파 사건

1983년 10월 9일 버마(현 미얀마)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을 방문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 일행의 암살을 시도한 북한의 폭탄테러나 아웅산 묘소테러로 착각해 아웅산이라는 산에 있는 묘소에서 테러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버마의 아웅산 암살 폭발이라는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외국에서는 Rangoon Bombing 버마의 수도 랑군에서 일어난 폭탄 테러라고 부른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미얀마를 대한민국과 우호적인 국가로 만들기 위해 1983년 가을로 예정된 서남아시아 및 대양주 6개국을 순방하다가 미얀마를 첫 순방국으로 지정하면서 첫 방문지가 됐다.전두환 대통령은 한국 정부 관료와 경호원, 취재진 등은 수도 랑군(현 양곤) 아웅산 묘역에서 대통령이 도착하기를 기다린다. 오전 10시 25분경(버마 현지 시간) 폭탄이 터져 참변을 당했다.대통령이 도착하기 며칠 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지령을 받은 북한군 정찰국 특공대 소속 진 소령 강민철 대위 신기철 대위 등은 묘소 천장에 원격폭탄을 설치했다. 대통령을 포함한 한국 각료들을 살해하기 위해서였다.

테러범들은 전두환 대통령이 도착하기 직전 착오를 일으켜 폭탄을 폭파했다. 폭탄이 터지면서 테러범의 전두환 대통령 암살 계획은 실패로 끝났지만 인명피해는 막대했다.

전두환 대통령의 운명이 뒤바뀐 4분 4분, 전두환 대통령의 삶과 죽음을 가른 시간이다. 불과 4분 차이로 아비규환이 된 테러 현장에서 몸을 피할 수 있었던 전두환 대통령이 운명의 시간에는 외교적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대통령을 수행하는 미얀마 외무장관의 차량이 고장나 4분 지각하자 전두환 대통령은 역시 4분 늦게 아웅산 묘역으로 출발했다.(이순자 여사가 화장실에 다녀왔다는 얘기도 있다) 이 사실을 모르는 테러범들은 예상한 시간에 지나가던 이계철 대사의 차를 대통령 차로 착각한 것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의 운명이 뒤바뀐 4분 4분, 전두환 대통령의 삶과 죽음을 가른 시간이다. 불과 4분 차이로 아비규환이 된 테러 현장에서 몸을 피할 수 있었던 전두환 대통령이 운명의 시간에는 외교적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대통령을 수행하는 미얀마 외무장관의 차량이 고장나 4분 지각하자 전두환 대통령은 역시 4분 늦게 아웅산 묘역으로 출발했다.(이순자 여사가 화장실에 다녀왔다는 얘기도 있다) 이 사실을 모르는 테러범들은 예상한 시간에 지나가던 이계철 대사의 차를 대통령 차로 착각한 것이었다.

서석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범석 외무장관김동휘 상공부 장관서상철 동력자원부 장관공식 수행원 및 취재진 17명이 목숨을 잃었고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물론 나머지 순방 일정은 모두 취소했다. 아웅산 암살 테러사건은 북한이 저지른 범행으로 밝혀졌으며 미얀마 정부는 사건 발생 사흘 뒤(1983년 10월 12일) 북한 공작원 강민철 등 2명을 긴급체포해 1명을 사살했다고 밝혔다.이 장면을 폭발 몇 초 전 카메라에 담은 사람은 연합뉴스 최금영 기자다. 한국사진기자협회가 2003년 발간한 나의 취재기에서 당시 상황을 상세히 밝혔다.당시 최·장금이 기자는 “부총리 등 정부 요인과 취재 기자 등 17명이 사망한 이 역사 마토바 면을 고인이 놓치지 않은 것은 우연이었다.당시 대통령 동행 기자 자격으로 현장에 참석한 그는 묘지에서 사진 찍기에 좋은 위치한 뒤 참배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카메라 시험 때문에 흑백 필름이 든 카메라로 사절단의 모습을 찍었다. 후에 피투성이가 된 채 현장에서 발견된 최·금영 기자의 카메라에는 역사적 순간이 담긴 흑백 필름 1개가 들어 있었다. 이 사진에서 그 해 한국 기자 협회 특종상으로 한국 신문 협회상 등을 수상했다.그러나 당시 갑자기 날아든 파편이 심장 근처에 박히고 숨을 거두까지 육체적 고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최 니시키에(최·장금이 기자와 함께 취재한 동아 일보 이준형 기자를 먼저 보낸 것에 대해서,”평생 가슴 아파하며 서울 동작동 국립 묘지에 있는 이준형 기자의 묘소를 방문할 때마다 그는 오히려 너와 나의 자리가 바뀌었으면 한다”으로 시달렸다고 한다.아웅산 묘지 테러 사건 발생 몇 초 전을 담은 유일한 역사로 기록돼 있다.광주 출신인 최금영 기자는 연합뉴스에서 사진부장, 사진담당국장 등을 역임하고 1993년 정년퇴직했다. 최금영 기자는 2003년 10월 9일 사망 숙환으로 사망했다.1983년 유례없는 참사였던 만큼 의혹과 추측이 여전히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전두환 대통령은 어떻게 테러를 피할 수 있었을까! 북한은 왜 테러를 저질렀나! 보복공격 벌초 계획은 왜 실행되지 않았나!1984년 갑자기 불어온 남북관계의 훈풍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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