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나비’처럼 이른 새벽 <가수 김정호>

작은 가슴으로 큰 발자국을 남긴 배우

가수 김정호는 본명이 조용호, 1952년 3월 전남 광주에서 아버지 조재영씨와 어머니 박숙자씨 등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아버지는 여수경찰서장을 지냈으며 출판사를 경영했으며 어머니는 명창 김소희와 함께 활동한 창의 명인으로 유명하다. 외할아버지 박동신은 국악계의 거인이었지만 납치돼 생사를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의돈 시절부터 김정호의 음악성을 인정해온 기독교방송 김진선 PD는 데뷔곡 <이름 모를 소녀>를 듣고 “한국의 모차르트 탄생”이라고 극찬했다. <이름 모를 소녀>는 부인 이영희를 애타게 짝사랑하며 품은 회한을 담은 노래. 교동초등학교 선배의 사촌동생이었던 부인은 김정호가 중학교 시절부터 눈독을 들이고 오랜 세월을 홀로 태운 평생 반려자였다.

자신의 일상적인 음악생활을 이야기하는 연애편지를 하루에 몇 번 보내고 용기를 내어 집으로 돌아갔다. 보수적인 그녀의 어머니는 직업도 불안정해 음악을 한다는 김정호가 신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순수한 심성의 사촌 후배가 싫지 않았던 이영희. 1974년 늦봄 셰르부르에서 노래하고 있는 김정호 앞에 불쑥 나타났다. 3년간의 열애 끝에 77년 반포의 17평짜리 주공아파트에 살며 쌍둥이 딸 정숙과 정운을 얻었다. 12번이나 이사를 거듭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인기 1위 가수였지만 존경하던 신중현과의 첫 만남에 감격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을 정도로 순수했던 김정호.1975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마 파동에 휘말려 음악적 사형선고를 받았다. 대마는 자신의 노래 ‘작은 새’처럼 좌절과 방황의 견디기 힘든 고행의 길을 걷게 했다. 매니저 이상기와 형처럼 김정호를 돌보던 최무송은 경제적 이중고까지 겪는 그를 위해 76년 10월 무교동에 꽃잎이라는 생음악 식당을 맡겼다. 1983년 재개발로 헐리기 전까지 꽃잎은 유일한 가무대였다.

김정호는 좌절 속에서도 작곡에 전념하며 인생의 전부인 음악을 포기하지 않았다. 한 달 중 20여일은 한적한 남이섬과 우이동 월벽산장에 머물며 사라지는 음악혼에 불을 붙였다. 1977년 방위소집으로 군 복무를 마칠 무렵 심한 감기는 지병을 재발시켰다. 함께 활동이 금지된 하남석은 이 당시 둘도 없는 음악 친구.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삶에 대한 고민은 물론 국악 리듬에 어쿠스틱 기타와 신디사이저를 접목하는 새로운 음악을 함께 구상하기도 했다.

80년, 5년 만에 대마 망령에서 벗어난 김정호는 재기앨범 인생-유니버설, K-APPLE-893, 80년 3월을 발표했지만 해금의 달콤함도 잠시. 오랜 정신적 고통과의 싸움에 지쳐 만신창이가 된 심신 때문이었다. 인천 바닷가에 위치한 결핵요양소에 입원했다. 과거 화려했을 때는 관심이 없다. 인기보다는 마음에 드는 좋은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말했던 김정호. 1년 넘게 치료를 해야 했지만 결핵균보다 더 강하게 꿈틀대는 음악적 열정은 4개월 만에 요양원을 뛰쳐나갔다.

82년 다큐멘터리 음악에 빠져 있던 투아에 무아 출신 이필원과 친해지면서 신디사이저로 만들어내는 환상적 음악에 빠졌다. 새로운 음악적 열정이 꿈틀거리자 김정호는 오산 단식기도원과 삼각산 산상기도에 매달리며 살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이필원이 직접 디자인한 <당신-아세아, 1983년 11월>은 김정호의 국악적 감성이 배어 있는 눈물겨운 앨범이다. 외삼촌의 국악에 자신의 음악을 접목시키고자 아쟁, 가야금, 징을 직접 치며 사라지는 생명의 불길에 영혼을 담으려 했다.

아내 이영희는 “신보 제작은 뒷전이었고 차에 꽹과리를 싣고 1시간씩 두드렸을 정도로 국악에 빠져 있었다”고 말했다. 그 원망스러운 한숨의 이미지를 담은 노래가 <당신>이었다. 그것은 죽음을 예견한 상여를 연상시키는 선율이었다. 머리가 번쩍 뜨이는 듯한 섬뜩함을 느끼게 하는 <당신>은 바로 온몸을 불태운 김정호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또한 수록곡 ‘외로운 여자의 미소는 슬프다’는 요양원 시절 송도 해변을 걷는 여성에게서 느꼈던 슬픔의 이미지를 이끌어낸 히트곡이다. 이 앨범은 숨쉬기조차 어려워 5개월의 최장 시간 녹음을 해야 했던 그의 유작 음반이다.

85년 11월 29일 33세의 천재 음악가 김정호는 50여 곡의 주옥같은 곡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너무나 사랑했던 아내에게 “고생시켜 미안하다”는 애틋한 유언만 남긴 그는 흰눈이 내리던 날 경기도 고양 기독교공원묘지에 안장됐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타인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하고, 죽어 가는 순간에도 음악적 열정을 불태우며 행복했던 진정한 대중음악가 김정호. 사후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수많은 헌정 앨범과 편집 앨범이 쏟아져 나왔다.

86년 10월 동료들에 의해 세워진 묘 앞 노래비에 새겨진 하얀 나비의 때가 되면 다시 필 것이다. 슬퍼하지 말라는 노랫소리처럼 인생을 슬프게 노래한 그의 영혼은 <흰나비>처럼 그를 그리워하는 대중 곁에서 영원히 순백색의 날개짓을 하고 있다.

지식리더 김민화의 글/사진 구글 이미지

▲ 뚝섬에서의 김종호. 1985년 [박선서의 7080 가요 X파일]’흰나비’ 가수 김정호와의 마지막 인터뷰 (2) 그의 재능은 외탁 같다. 서편제의 큰 줄기이자 창작 판소리의 창시자로 일컬어졌던 월북소리꾼 박동실 선생이 바로 그의 외할아버지이다. 월북에 의해 그의 존재는 판소리사에서 한때 묻혀 있었는데, 박동실은 명창 김소희와 박성희 등을 키운 인물로 김정호의 어머니인 박숙자 여사와 함께 ‘아성극단’을 만들어 만주와 상하이 등지에서 공연을 가기도 했던 ‘명인’이었다.

하지만 어머니 박숙자 씨는 아들 정호가 6살 때 집 안에 있던 국악기를 모두 버렸다. 심지어 가야금 현까지 모두 잘라버렸다. 그 힘들고 힘든 악극단 생활을 아이에게까지 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기억이 잡힐 듯 생생함에도 불구하고 김정호는 운명처럼 ‘금지된 길’을 걷는다. 그리고 끝까지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음악에 몰두했다. 여운이 긴 애상적인 바이브레이션을 구사한 김정호, 노래가 유독 슬프게 들린 것은 그가 노래 안에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처음 김정호가 노래 만드는 일을 시작한 것은 대동상고 시절 밴드부에 합류하면서였다.

그리고 졸업 후에는 기타를 두른 채 방랑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그는 종로 낙원상가 주변을 맴돌았고 심지어 잠자리조차 없이 거리로 내놓은 이삿짐 속 캐비닛에 들어가 잠을 자기도 했다. 이 무렵 잠시 미 8군 무대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곧 다시 떠돌이 행진이 됐다. 어느새 익숙한 것은 음악보다 먼저 배고픔이었다. 당시 한 그릇에 5원이던 근로자 합숙소 면, 한 접시에 10원이었다는 남대문시장 수제비 등으로 허기를 채우며 일자리를 찾으러 다니던 시절도 있었다고 그는 털어놨다.

첫 데뷔 앨범을 보고 싶은 마음/이름 모를 소녀 재킷 1974.5. 한때 가수 백승진씨와 함께 ‘4월과 5월’ 멤버로 잠시 활동하기도 했던 그는 어니언이 그의 곡인 ‘작은 새’를 히트시키기에 이르자 음악성을 주목받으며 작곡자에서 가수로 변신, 무대에 선다.어쿠스틱 기타를 멘 채 눈을 감고 꿈꾸듯 노래하는 그의 독특한 모습. 그는 76년 3월 자신의 25번째 생일에 아내 이영희 씨와 백년가약을 맺는다. 하나 이 축복도 잠시였다. 건강은 더욱 악화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방공연을 하는 친구를 따라가다 방위소집에 응하지 못하고 결국 탈영병으로 군영창에 갇히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군 복무를 마치게 되지만 가정은 이미 어려워져 매번 이사를 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평 한마디 없는 그의 아내는 자신에게 “항상 따뜻한 사람이었다”고 털어놨다. 아내는 그가 건강이 나빠져 공기 좋은 곳으로 가려면 그렇게 했고, 친구 곁으로 가려면 또 그렇게 했다. 경제적으로 견디지 못해 어머니 곁으로 가야 한다고 말하자 다시 그의 뜻을 따랐다.

하지만 80년 끈질긴 투병과 아내의 보살핌으로 완전히 나았다는 그의 결핵은 다시 재발했고 마침내 각혈이 시작되자 결국 인천요양소에 격리돼 요양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이 시기를 ‘공백’이라고 표현하는 것에 대해 매우 불만을 품었다. 비록 그 시기에 대중 앞에 나서지 못했지만 스스로는 항상 음악의 한가운데 있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동안 그는 많은 곡을 만들고 악기 소리를 연구하고 음반도 구입했다. 그가 타계하기 얼마 전 담당 의사는 그에게 경고했다. 적어도 6개월에서 3년 정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어야 한다고. 심지어 노래를 다시 부르면 죽을지도 모른다고까지 경고했다. 결핵환자에게 노래는 호흡기관에 매우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그는 노래를 못하면 오히려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는 병보다 뜨거운 음악에 대한 열병을 또 그렇게 앓고 있었다.

“켄배기 소리에 미쳐 살아요.” 인터뷰 당시 그는 자신의 생활을 이 한마디로 압축해 표현했다. 우리만의 것, 우리만의 맛, 우리만의 텐션. 내가 해야 할 일을 이제야 찾은 느낌이라고 털어놨다. 그래서 그 무렵 뜻이 맞는 친구들과 사물놀이패를 조직하기도 했고, 또 항상 꽹과리를 들고 다녔다. 병이 악화돼 병원으로 다시 옮겨질 때도 꽹과리를 병실에까지 들여와 담당 의사의 혀를 내둘렀다. “남은 열정을 모두 국악에 바친다.”며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의지를 보였던 김정호, 그가 새삼 그립다.

참고문 : 서울신문 여성중앙 [email protected]

2010.03.26 / 18779. 48

danajo:검은 옷 검은 눈동자의 수줍음처럼 조용했던 그 모습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꽃잎에 가면 그는 그 모습으로 언제나….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그립습니다..나의 젊은 날과 함께…

낙원동 : 재능 있는 사람이었어요… 중학교 반 친구.

아레나 24: 저는 중학교 2학년때.. 이름을 모르는 소녀를 우연히 듣고 김정호씨의 테이프를 사서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린 나이였는데도 한 곡 한 곡이 심장을 때렸어요. 그때가 86년이었는데 테이프 속 작은 설명문을 보고 조세를 했다는 걸 알게 됐는데.. 그래서인지 노래도 사람도 신비로운 느낌을 받았어요. 방송에서 한 번 더 특집극 같은 거 나왔으면 좋겠어요.

오래된 사람 : 김정호 슬픔이 많은 사람이군요. 어머니는 창문을 하지 않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열사로서 창문을 지어서 유명한가. 육오조선으로 월북하여 평양무용단을 운영하고 김일성대학교에서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남한 가족은 사람처럼 살 수 없어 지금도 숨기고 촌을 지내고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말 못할 사연들이 많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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