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폼페이 유적, 폼페이 화산, 영화 폼페이 최후의 날 (이탈리아)

로마 폼페이 유적

로마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폼페이였다. 폼페이는 1700년 후 그곳을 개발하던 노동자들에 의해 세상에 밝혀졌다. 당시 발굴 감독이었던 고고학자 빈겔만은 옛 서적을 읽던 중 그곳이 폼페이라는 것을 직감했다고 한다. 그는 폼페이의 보물은 ‘세계의 유산’이라고 주장했고, 그로 인해 감독 자리에서 쫓겨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발굴된 유물은 왕의 소유가 되어 발굴 장소를 흙으로 덮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빈겔만은 뒷돈을 주고 발굴 장소에 들어가 유물을 기록으로 남겨 폼페이를 세상에 알리고 영광을 누렸으나 타살로 사망했다.

폼페이 메인 광장 폼페이는 소설처럼 들려 전설인 줄 알았는데 현장을 보면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폼페이의 흔적을 바탕으로 한 도시복원도에는 완벽한 도시 형태를 갖춘 폼페이가 있었다. 복원도에 그려진 건축물은 하나같이 크고 웅장했다. 당시는 로마 전성기로 로마 귀족들이 들어와 경쟁적으로 별장을 지었다고 한다. 지금은 무너지지 않았지만 분수대가 있는 큰 연못, 멋진 베란다가 있는 석조 저택 등 자리에 남은 흔적은 한눈에도 뚜렷이 보였다. 그 밖에 목욕탕, 체육관, 아고라, 원형 경기장 등은 완벽한 도시임을 입증했다.

전시실 석고상 전시실에는 많은 석고상이 있었다. 남녀가 부둥켜안은 모습, 아이를 안은 채 웅크린 엄마, 식탁에서 식사 중인 가족, 먹던 빵 조각과 식기 등은 갑자기 그날의 일을 이야기했다. 마치 도시 전체가 동작정지 한마디에 멈춰버린 것 같았다. 더구나 석고상이 실제 모습이라며 아연실색했다. 발굴하면서 시체는 보이지 않고 빈 공간만 있어 의아해 하던 중 거기에 석고액을 부어보니 사람, 개, 말 등의 모양이 나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본 수많은 공간은 뜨거운 화산재에 시체가 분해되면서 생긴 것이었던 것이다.

공중목욕탕 내부장식 기원전이라면 마차도는 흙먼지가 날리고 바퀴가 진흙에 빠져야 정상일 것이다. 폼페이는 그런 상상을 쉽게 비웃었다. 대리석이 버젓이 깔린 7m 정도의 넓은 도로는 현대 도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급스러웠다. 아스팔트는 대리석을 절대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일행 모두 감탄사를 연발했다. 게다가 오늘날의 시가지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차이라면 마차가 지나 차도 폭이 다소 좁을 뿐 턱을 들어 인도와 구분한 것까지도 마찬가지였다.

폼페이 옛 도로상가는 캉캉이 같은 치수로 나뉘어 있어 현대 분양상가를 능가했다. 복원된 대장간 옆에는 식료품점, 식당, 상점 등이 쭉 있었을 것이다. 특히 인도에 설치된 공동수도와 주거지로 연결된 수도관을 바로 수용하기 어려웠다. 우리가 수도를 사용한 지 100년밖에 안 됐어. 가슴이 찡한 것은 도로 위 마차 바퀴에 긁힌 자국이 마치 어제의 흔적 같다는 것이었다. 그 흔적에서 덜컹거리는 마차 소리와 옛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식당 아궁이 도심을 벗어나 조용한 곳으로 들어갔다. 집터, 텃밭, 도로 등이 격자로 이루어져 있어 마을임을 알기에 충분했다. 그곳은 이른 봄 화창한 햇살 아래 생생한 다른 마을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옛 주민들의 숨결이 마을 곳곳에서 느껴졌다. 하지만 단 한 사람 보이지 않는 길을 걷으려니 어딘가 섬뜩했다. 문득 어디선가 느낀 듯한 기세가 뇌리를 스쳤다. 그게 뭘까 했더니 좀비였어. 좀비는 확실히 사람이 살 만한 마을에서 하나 둘 소리 없이 나타난다. 폼페이는 그런 유령도시가 되어버렸다. 집터 위에 집이 그려졌고 밭에서는 일하는 농부들이 어른거렸다. 따사로운 햇살은 집에서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을 집 밖으로 끌어낼 기세였다. 그러나 마을은 영원히 텅 빈 채 존재할 것이다.

폼페이 옛날 마을 영화 폼페이 최후의 날폼페이에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폼페이 마지막 날’이 상영됐다. 요즘 기법이 뛰어나 영화 소재로 그만한 게 없어 보였다. 영화는 예상대로 그래픽으로 폭발 장면을 생생하게 그렸다. 지진보다 화산 폭발이 더 무섭다는 것도 전했다. 화산 분화는 지진이 일어난 상태에서 용암이 흘러 돌멩이가 날아온다. 폼페이를 덮친 화산 폭발이, 그래서 뜨거운 암석과 재가 도시 끝까지 날아간 경우였다.폼페이에서 대폭발이 일어나기 16년 전 이미 한 차례의 대지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도 큰 재난은 피하기 어려워 당시로서는 그 의미조차 몰랐을 것이다. 그 문제가 많은 베수비오 화산은 지금도 활동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날 본 폼페이는 유적의 일부였다. 발굴이 끝나면 완벽한 폼페이가 기대된다. 폼페이 유적은 보존 상태가 완벽에 가까워 고고학계에서 최고로 평가받고 있다. 폭발 당시 화산재가 도시 전체를 두껍게 덮어 가능했다고 한다.마을 입구 다음은 ‘소프리니우스’가 아버지를 따라 폼페이 재난 구조에 나섰고, 구사일생으로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문이다. 폼페이에서 본 것과 일치한다. 서기 79년 8월 24일 아침이었다. 거동이 불편한 로마 시민들의 여름 휴양도시 폼페이는 바쁘고 활기찼다. 나폴리에서 12km 떨어진 베수비오 산기슭에서 사르누스 강 어귀에 세워진 항구도시 폼페이는 로마제국의 화려함을 잘 보여주는 사치스러운 도시였다. 베스비오산은 가끔 연기를 내뿜었지만 16년 전 폭발한 뒤로는 그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 사람들은 가끔 연기를 내뿜는 모습이 오히려 폼페이의 경관을 더 멋지게 만들어주고 있다고 말했다.별장 욕조 바닥 정오경 며칠간 이어진 땅의 흔들림이 갑자기 심해졌고 이내 베수비오에서 하늘을 뒤덮는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사람들이 몸을 피할 사이도 없이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산정이 깨지고 뜨거운 화산재와 용암이 비오듯 쏟아졌다. 새들은 날아서 낙엽처럼 떨어졌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짐승들도 은신처를 찾아 당황했다. 화산은 끊임없이 분화했고 검은 연기와 불길이 하늘을 완전히 뒤덮었다.약 4시간 뒤 인구 2만 명 중 2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해변으로 도망쳤다. 베스비오 화산재는 30km나 떨어진 미세눔마저 날아오고 있었다.로마제국의 미세눔 해군사령관이었던 플리니우스는 함대에 출동명령을 내렸다.”모든 배는 폼페이로 가서 해변으로 탈출한 시민들을 구하라!” 함대가 폼페이 항에 이르자 배 위로 화산재와 경석이 쏟아졌다. 해변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검은 연기에 휩싸여 있었다.폼페이의 옛 도시 소프리니우스는 카스텔라마레로 뱃머리를 돌렸다. 그는 폼페이 시민들이 해변을 따라 그곳에 가기를 기대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해변을 달려오고 있었다. 함대는 서둘러 카스텔라마레 해안에 배를 두고 사람들을 구조하기 시작했다.그때 믿을 수 없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 바람이 갑자기 낮게 불어서 해변으로 밀려왔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화기와 강한 가스가 순식간에 함대를 덮쳤다. 구조 작업을 지휘하던 플리니우스, 로마 병사, 그리고 구조된 지 얼마 안 된 폼페이 시민들은 독가스에 질식해 모두 죽고 말았다.폼페이 원형 경기장폼페이 원형 경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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